1. 클라라 슈만의 초기 생애
2002년 유럽 연합의 통화가 유로화로 통합되기 이전, 독일의 100마르크 지폐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음악가였던 클라라 슈만의 초상이 삽입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천재 음악가 로베르트 슈만의 필생의 연인으로 더 알려져 있지만 그녀는 당대 유럽 전역에 천재 음악가로 명성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서양음악사와 독일에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로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여성 중 한명입니다.
클라라 조세핀 비크 슈만(Clara Josephine Wieck Schumann)은 1819년 9월 13일 작센 왕국(現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프레드리히 비크(Johann Gottlob Friedrich Wieck, 1785 – 1873)라는 음악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촉망받는 소프라노 가수였던 어머니와 아버지는 일류 피아니스트로 자라 ‘빛나는 인물’이 되라는 뜻으로 딸에게 Clara Josephine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죠. 그리고는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가르쳤고, 비록 부모님이 이혼한 이후에도 아버지는 클라라에게 체계적인 음악공부를 시켰는데, 피아노와 작곡에 독보적인 재능을 보였던 클라라는 유럽 전역이 인정하는 피아노 신동으로 주목받았고, 1828년 10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데뷔 무대를 가지며 그 해 로베르트 슈만과의 운명적인 첫만남을 갖게 됩니다.
2. 로베르트 슈만의 초기 생애
로베르트 알렉산더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은 서양음악사에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긴 인물로, 초기 낭만주의 를 확립한 작곡가 중 한명이죠. 그는 당대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였지만 과대한 연주 활동으로 손가락 부상을 입은 후 남은 생은 작곡가와 평론가로서 살게 됩니다.
우리는 천재 작곡가로 그를 기억하지만, 그의 생은 평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1810년 6월 8일 작센 왕국(現 독일) 츠비카우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슈만은 출판업자이자 소설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덕인지 어려서부터 문학적 및 음악적인 두각을 여실히 드러내었는데, 다양한 에세이를 쓰고, 출판사에 기고하기도 하였던 그의 경험은 훗날 문학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곡된 다양한 작품들에서 엿볼 수 있으며, 음악 평론가로서의 활동에 기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슈만의 재능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는 어머니의 소원대로 1828년 라이프치히 대학 법학과에 진학하지만, 음악을 너무도 사랑했던 그는 결국 이 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2년만에 훗날 아내인 클라라의 아버지 프레드리히 비크의 제자가 되어 피아노 공부하게 됩니다. 당시 프레드리히 비크의 집은 음악인들이 모여 음악과 문학을 토론하고 나누는 사교의 장이었고, 슈만은 비크의 집에서 하숙하면서 그의 반려자가 될 클라라와 만나게 되죠. 처음 만났을 때는 클라라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둘이 이성적인 감정을 가지기엔 어려웠으나, 그들은 음악적 호기심 등과 같은 지적인 면들을 공유하며 음악적으로 좋은 동료가 되지요.
1830년대는 쇼팽과 리스트처럼 피아노곡이 악마적 기교를 요구하던 시기였는데, 천재적인 기교와 음악적 재능을 바탕으로 유명세를 떨치던 그들을 따라잡고자 슈만은 이상한 장치를 만들어 손가락 강화 훈련을 했는데, 이 잘못된 욕심이 결국 두 개의 오른손가락에 영구적인 부상을 입히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후 슈만은 연주자의 삶을 포기하고 작곡에 전념하기로 결심하여, 라이프치히 오페라의 지휘자이자 작곡가였던 하인리히 도른(Heinrich Dorn, 1804 - 1892)에게 음악 이론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비크의 품을 떠나면서 클라라와 러브레트와 작품을 왕래하면서 사랑의 달콤함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가득 담긴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3. 슈만 부부의 결혼생활과 말년
이후 클라라와 슈만의 결혼까지 이루는 과정은 파란만장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1839년 29세의 청년 슈만은 둘의 결혼을 결사 반대하는 클라라의 아버지 프레드리히 비크를 작센 왕국의 라이프치히 항소법원에 고소해 버렸죠(와~ 이 때 부모 말을 들어야 하는 건데..). 당시 작센 민법에 의하면 21세 부터 성인으로 인정되고 성인이 되면 부모님의 동의 없이 결혼할 수 있었는데, 클라라가 성인이 되려면 1년 2개월이 남았기 때문에 소송에 돌입한 것이었죠(헐~~~). 이 재판은 1840년1월에 결혼 허가하라는 슈만의 승소로 끝나지만 이후 이어진 항소로 인해 소송은 1년 58일 간 진행되었고, 결국 그들은 클라라가 성인이 되기 겨우 하루 전에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OMG).
슈만에게 이 결혼은 늘 동경하고 꿈꿔온 것이었기에 결혼 생활 초기에는 정신적으로 안정되고 행복이 넘쳐 지금의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을 있게 해준 엄청난 걸작들이 쏟아져 나왔고, 클라라는 슈만의 작곡 활동에 엄청난 내조의 여왕이었죠.이들 부부의 결혼은 세기의 낭만적인 사건으로 기억되지만, 정작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불행과 갈등의 연속이었습니다. 슈만은 조선의 사대부 집안만큼이나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클라라에게 억압적일 때가 많았습니다. 게다가 결혼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로베르트 슈만에게 나타난 양극성 장애 증상과 클라라의 음악성에 대한 질투심은 온전한 가정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되었죠. 무명의 작곡가였던 남편을 내조하기 위해 클라라는 자신의 커리어를 내려놓고 헌신적으로 가정을 꾸려 나갔지만, 슈만의 양극성 장애 증상은 점점 악화되어 1854년 2월, 뒤셀도르프에 있는 라인강에 투신 자살을 시도하는 일로 인해 슈만은 정신병원에 수감되었고, 2년 후인 1856년 7월 29일 클라라의 품에서 영원히 잠들며 마침내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의 죽음 이후 클라라 슈만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연주활동을 다시 시작하였지만 작품을 더 이상 쓰지 않았는데, 40년간 왕성한 연주활동을 이어가며 로베르트 슈만의 작품들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습니다. 어쩌면 이 방법이 너무 사랑했던 슈만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달래는 그녀만의 방법이었을 수 있지 않을까요?
클라라 슈만은 오랜 시간동안 훌륭하고 존경받는 지도자이기도 했는데, 당시 사회 분위기가 여성을 독립적인 주체로서 인정하지 않아 많은 제약이 있었음을 감안하면, 그녀는 음악사에서 정말 위대한 음악가였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로베르트 슈만이 세상을 떠난 지 꼭 40년 째가 되던 해인 1896년, 향년 77세로 클라라는 남편 곁에서 영면에 들게 되었습니다.
클라라는 슈만의 모든 작품에 영감을 주었던 영원한 뮤즈였습니다. 자신 또한 위대한 피아니스트이자 뛰어난 재능을 보유한 작곡가였지만 세상에 단 한 명 뿐인 온전한 슈만의 편으로 그의 아내로서 온 인생을 살았죠. 만일 슈만이 시대의 어귀로 흘러간 자신의 독백과 처절한 고독의 표현이 불과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이렇게 많은 이들을 위로하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조금 더 편안한 삶을 살며 자신 옆에 늘 머물며 온 사랑을 표현했던 클라라를 더욱 사랑하고 인정하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저 슬프게 흘러가 버린 그들의 생이 조금은 안타까운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