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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음악가10] 멘델스존 - 그가 행운아(Felix)였다고요?

by 언젠가 파리 2024.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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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 연주, 지휘 능력에 5개 국어에 능통했던 천재적인 재능,

부유한 가정환경, 준수한 용모, 세련된 사회성

모든 것을 갖춘 19세기의 사기캐, 멘델스존

꽃비단길처럼 행복했지만 너무 짧았던 생

1.  야코프 루트비히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23일에 함부르크에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난 멘델스존은 그의 이름 펠릭스(Felix)가 '행운아'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이 우연이 아닌 것처럼 단순한 금수저가 아닌 다이아몬드 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최고의 명문가 출신이자 계몽주의 철학자였던 할아버지 모세 멘델스존으로부터는 지적 재능을, 독일에서 은행을 처음 운영한 은행장이자 베를린 시의회 의원으로 금융재벌이었던 아버지와 1755년 당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제가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단행한 화폐 개혁으로 천문학적인 이익을 얻은 외조부로부터는 막대한 부를, 그리고 아마추어 음악가였던 어머니로부터는 음악적 소양을 모두 물려받았죠.

 

  부모님의 헌신적인 지원으로 펠릭스 멘델스존은 당대 최고 수준의 지적 교육을 받았고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다양한 재능의 인사들과 교류하고, 스코틀랜드의 핑갈의 동굴 같은 멋진 곳에서는 그림도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고전 등을 읽었으며, 어린 시절부터 음악 교육도 제대로 받았는데, 이것이 그의 창조적 능력의 원천이 된 셈이지요. 그래서 9세에 부모님으로부터 오케스트라 선물 플렉스를 받으면서 진정으로 음악을 즐겼던 멘델스존은 이제껏 소개된 많은 음악가들(특히 비극적인 생애를 보낸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슈베르트에 비해)의 고달팠던 인생 역정과는 여러모로 비교되는 인물입니다. 멘델스존은 이런 혜택받은 풍족한 삶과 재능, 우아한 용모와 세련된 사교성으로 뛰어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고, 왕후들은 앞다투어 그를 초대했고, 연주회는 도처에서 성공을 거두었으니, 그의 인생은 항상 봄바람이 부는 듯했고, 그의 미래는 맑게 개인 푸른 하늘의 태양과도 같이 빛날 듯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나는 저명한 아버지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저명한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다"라고 고백한 것처럼요.

  그러나 그의 행복한 삶을 질투라도 하듯 그의 인생은 너무 짧았는데, 음악에 대한 집요한 집중으로 인한 과로와 사랑하는 누이를 잃은 슬픔에 빠져 1847 11 4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뇌졸중으로 라이프찌히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너무 완벽했던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Bartholdy)의 삶에서 넘을 수 없는 벽 하나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그의 가문이 유태계라는 사실이었고 멘델스존은 아버지가 차별을 받지 않도록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야코프 루트비히(Jakob Ludwig)라는 세례명을 받게 됩니다. 멘델스존 자신은 유태인이라기보다 자랑스러운 독일인이란 정체성에 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사후 유태인으로 규정되어 나치의 멘델스존 흔적 지우기로 인해 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지게 되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2. 멘델스존에 의해 다시 태어난 바흐의 명곡

라이프치히 국립음악대학 - 펠릭스 멘델스존 음악원

  클래식의 나라 독일답게 독일의 각 도시에는 세계적인 음악대학들이 있고 각 대학들은 클래식 작곡가들의 이름이 붙은 학교의 닉네임이 있습니다. 멘델스존의 이름을 딴 음악대학은 라이프치히에 있는데, 작곡가로서만이 아니라 고전 음악에서 현대까지 지속되는 여러 가지 업적을 남긴 멘델스존과 이 도시는 너무 각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흐가 활동했던 라이프치히에서 세계 최고의 교향악단으로 평가받는 게반트하우스(Gewandhausorchester Leipzig)의 지휘자를 지냈던 그는 근대 오케스트라의 기초를 확립하고 현재 지휘자의 기능과 직책을 확립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어요. 그리고 이 곳에 음악원을 설립하고 슈만과 같은 우수한 교수진을 유치하기도 하는데, 이 펠릭스 멘델스존 음악원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대학인 셈이죠. 

 

  음악사에 멘델스존이 남긴 위대한 업적을 꼽자면, 1729년에 초연되었다가 잊혀졌던 <마태 수난곡>을 바흐 사후 약 80년의 시간이 흐른 1829년에 재발굴하여 세상에 알린 일입니다. 그는 '위대한 음악가들의 발자취를 알지 않고는 좋은 음악을 작곡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고악보 연구와 수집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젊은 시절 베를린의 음악 아카데미 원장인 첼터(Karl Friedrich Zelter)은 멘델스존에게 음악과 작곡을 가르치는 한편,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괴테의 집에 멘델스존을 데려가 정기적으로 바흐의 곡을 연주하게 했습니다. 괴테는 멘델스존이 연주하는 바흐의 곡에서 ‘마침내 창조주가 창조 전에 느꼈던 영원한 하모니를 체감하였다’는 독백을 남겼다고 하죠.

  그 과정에서 바흐의 <마태 수난곡>악보를 발견하고는 거액에 사들여 복원하고 바흐의 음악을 연구하던 멘델스존은 바흐의 <마태 수난곡>100년 만에 다시 연주하겠다고 도전합니다. 하지만 바흐 신봉자이자 멘델스존에게 바흐를 가르쳤던 스승 첼터마저도 이 곡의 연주에 반대했죠. 100년 동안이나 잊힌 옛날 풍의 음악을, 그것도 3시간에 달하는 길고 지루한 음악을, 누가 들으러 오겠냐며 걱정했던 겁니다. 하지만 멘델스존은 어렵사리 첼터를 설득해 원곡 악보에 자신의 해석을 가미해 18293월 대중들에게 바흐의 잊혀졌던 명곡을 연주하고 대성공을 거둡니다.

 

3. 잔인한 히틀러의 멘델스존의 흔적 지우기

  그러나, 100년 후 나치 치하로 세상이 바뀌면서 바흐의 위대한 작품 복원자였던 멘델스존의 공로는 빛을 잃게 됩니다. 유태인을 증오하고 혐오했던 히틀러는 순수 독일인인 바흐와 음악이 유태인인 멘델스존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는 사실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히틀러 치하에서는 멘델스존 스승이자 순수 독일인이었던 첼터가 1829년의 <마태 수난곡> 을 발굴해 멘델스존에게 <마태 수난곡>을 연주하라고 적극 권했다는 식으로 변질되었습니다. 

 

  히틀러의 만행이 이에 그치지 않았는데요. 1938년 나치는 멘델스존 아버지 아브라함이 창립한 멘델스존 은행을 (Deutsche Bank)로 흡수해 버렸을 뿐만 아니라, 아예 음악사에서 멘델스존의 기억을 지우려고까지 했죠. 나치는 박물관에 있던 멘델스존의 모든 유품과 악보를 불태웠으며 라이프치히 시민들이 그를 기념해 게반트하우스 근처에 세운 동상도 부숴버렸습니다. 심지어 한때 학교 음악 시간에 배웠던 노래의 날개 위에라는 유명한 가곡도 금지곡으로 지정될 정도였죠. 이유는 유대인 출신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의 시에 멘델스존이 곡을 붙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결혼 행진곡으로 더 잘 알려진 멘델스존 대표작 '한여름 밤의 꿈'을 대체할 새로운 '한여름 밤의 꿈'을 후대 작곡가에게 작곡하도록 종용하고, 여러 이유를 들어 멘델스존의 모든 곡을 금지곡 처분 내렸습니다.

  멘델스존이 생애 이런 경험을 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이마저도 그의 행운 덕분이라고 생각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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