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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음악가15] 라흐마니노프- 두번의 대전, 돌아가지 못한 고국

by 언젠가 파리 2024.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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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Vasil’evich Rakhmaninov, 1873-1943, 러시아)

  라흐마니노프는 4세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고, 다른 천재 음악가들과 마찬가지로 어린 나이였던 9세 1882년에 페테르스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정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하는데 이는 아버지가 귀족이자 지주였기 때문에 가능한 조기교육이었습니다.

  하지만 술, 도박, 여자에 빠져 사는 매우 방탕한 라흐마니노프의 아버지는 재산도 금방 탕진하게 되어 결국 어머니하고 별거하게 되고 아이들은 어머니가 혼자 키우다시피 했습니다. 이렇게 부모님의 불화, 누이의 죽음, 형의 입대 등 다양한 사건 등을 겪으며 반항아적 기질에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까지 이어지면서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내던 라흐마니노프의 인생에 전환점이 찾아옵니다. 1882년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한 라흐마니노프는 음악원에 입학하여 당시 명성을 떨치고 있던 피아노 스승 즈베레프 밑에서 합숙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는 제자들을 자기 집에 모아놓고 먹이고 재우면서 피아노 레슨을 가르치는 스타일이었는데, 굉장히 엄격한 레슨으로 유명한 선생이었다고 합니다. 이때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실력뿐 아니라 성품도 바로 잡혔다고 하네요. 라흐마니노프는 즈베레프 문하에서 탁월한 피아노 테크닉을 연마하는 동시에 전시회. 박물관. 연주회. 오페라 등을 정기적으로 접하면서 음악가로서 성장할 수 있는 전인적인 토양을 마련하게 됩니다. 그러나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연습이 너무 혹독하다 보니 이런 생활에 싫증을 내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그동안 접한 오페라나 다른 장르의 음악들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즈베르프 선생은 라흐마니노프에게 작곡가의 길은 접어두고 피아노에 전념하기만 강요하게 되고, 라흐마니노프는 결국 그 집을 뛰쳐나오게 됩니다.

  어쩌면 이 시기의 엄청난 연습량 덕분에 지금도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연주 실력에 대해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망명 이후에는 생계에 대한 문제 때문에 그리고 아방가르드 사조에 적응하지 못한 그의 작곡 스타일 덕에 더욱 피아니스트로서의 자리를 굳혀가게 됩니다.

  1888년부터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작곡법을 공부하게 되는데, 19세인 졸업하던 해 1892년에 썼던 피아노를 위한 전주곡 c샵단조」가 런던에 소개되어 호평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1899년 런던 필하모니 협회의 초대를 받아 작곡가·지휘자·피아니스트로서 인정받게 되었고, 피아노 협주곡의 작곡을 의뢰받았는데, 1897(24)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초연된 교향곡 제1(1895)은 평판이 좋지 않아, 이후 신경 쇠약이 심해져 한때는 창작이 불가능하게 될 정도였습니다. 1901(28) 암시 요법에 의해 겨우 회복될 수 있었던 라흐마니노프는 명작 피아노 협주곡 제2을 완성하여 러시아 최고의 음악상이라고 할 수 있는 글린카 상을 받게 됩니다. 젊은 라흐마니노프를 우울증에 빠지게 했던 첫번째 교향곡의 실패, 결혼을 반대했던 사촌과의 비밀 결혼, 비평가들의 혹평 등 여러 악조건에서도 우울증을 극복하며 완성한 역작으로 본인의 초연으로 대성공을 거둔 작품입니다. 1902년에는 경제적으로 자립도 하지 못한 채 섣부르게 결혼하게 되지만 이후 라흐마니노프는 승승장구해서 지휘자의 경력이 정점에 오르면서 볼쇼이 극장의 지휘자로 발탁되게 됩니다. 젊은 시절 오페라에 심취했고 성악, 실내악 등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던 라흐마니노프에게는 이 생활에 엄청 만족스러웠을 것입니다. 이 때 자신이 존경하는 차이코프스키가 타계했을 때 작곡한 추모의 곡 'Elegiaque' 등도 유명합니다.

  1906년 드레스덴으로 옮겨 작곡에 전념, 교향곡 제2, 피아노 소나타 제1, 교향시 죽음의 섬 Ostrov myortvikh을 완성하고 1908년에 귀국, 이듬해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피아니스트로 활약하는 한편 피아노 협주곡 제3(1909)을 뉴욕에서 초연하는 등 바쁜 일상을 살던 라흐마니노프에게 엄청난 시련을 시간이 다가 왔는데, 1905년 10월 러시아 1차 혁명이 터진 것입니다. 라흐마니노프는  귀족 출신에 영지를 가진 지주였기 때문에 혁명에 가담한 농민들의 대상이 되었는데, 본인은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예술가였고 농민들에게 항상 예우를 갖추었으니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 될 줄 알았기 때문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정치적 상황이 불안해짐에 따라 거주지를 옮겨 피신을 하게 되고 러시아와 드레스덴을 왔다 갔다 하게 되었고, 음악가로서 명성을 쌓아가던 시기에 제동이 걸린 셈이지요.

 

  라흐마니노프틑 생애 마지막 무렵이었던 69세에 캘리포니아로 거처를 옮기고 아내와 지내면서 종종 러시아 친구들을 초대하곤 했는데 고국인 러시아의 전쟁 기간 동안 자신이 풍족하게 살고 있는 것에 대해 항상 동유럽 전선 이야기가 우리 대화의 주된 주제였고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고통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2. 20세기 작곡가이지만 본인의 전곡을 레코딩한 천재

  작곡가이기 이전에 러시아의 후기 낭만파로 분류되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라흐마니노프는 20세기 작곡가로서도 드물게 본인이 작곡한 전곡을 연주한 레코딩이 남아있습니다. 당시에는 CD나 제대로 된 레코딩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1943년에 사망한 라흐마니노프의 연주 녹음이 깨끗하게 잘 되어 있는 것은 피아노롤이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인데, 피아노롤의 역할은 연주자가 피아노를 연주하면 롤이 돌아가면서 연주에 맞춰 종이에 구멍을 내면 연주 그대로가 기록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피아노롤


  위의 사진에서 느껴지듯이 라흐마니노프는 키도 크고 손도 엄청나게 컸다고 하는데 그 영향인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곡들은 도저히 사람이 칠 곡이 아닐 정도의 난이도 높은 곡들이 대부분입니다. 여담으로 이런 그의 남다른 신체 조건이 Marfan syndrome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오늘날에도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 중에서 라흐마니노프의 곡을 연주할 때 고강도의 연습을 해야 하고 손이 작은 사람은 연주를 꿈 꿀 수 조차 없어서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애를 먹기도 하지만 각종 콩쿠르에서는 자신의 테크닉을 선보이기에 이보다 더 좋은 레파토리가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많은 무대에서 연주되고 있습니다. 

 

 

 

아래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피아니스트 두 사람의 라피협을 소개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NMlq-hOIoc

조성진

 

 

 

https://www.youtube.com/watch?v=aMYlrfbDUJw

출처: https://bestgift10000.tistory.com/34 [언젠가 파리:티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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