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만 앙상하게 남은 깡마른 몸에 새하얀 피부를 지닌 파가니니의 연주를 본 사람들은 그의 연주실력과 외모를 보고는 '귀신이다'라고 외마디를 외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파가니니의 이 놀라운 연주력은 남들가는 다른 손가락의 유연성 덕분이었는데, 이는 콜라겐 결핍이 가져온 질환으로 엄지를 손등 위로 구부려 새끼 손가락과 맞닿게 할 정도로 손관절이 유연했기 때문에 높은 음과 낮은 음을 더 많이 그리고 더 빠르게 연주할 수 있어서 1초에 18개의 음을 연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특히 엄지손가락의 힘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해서 오른손으로 활을 잡고 왼손으로 현을 뜯을 수 있어 마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고 해요. 그런데, 이건 ‘엘러스-단로스 증후군’이라는 유전질환때문이었고, 이 질환 때문에 그는 꽤 오랫동안 관절통, 시각장애, 호흡곤란을 겪었다고 해요.
길고 긴 순회 연주 여행은 결국 파가니니의 건강에 치명타가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에 걸린 매독이 평생 완치되지 않았고, 병을 고치기 위해 사용한 수은 치료법으로 부작용까지 더해지며 그의 몸은 처참하게 망가져 갔죠. 그때부터는 아직 어린 외아들이 늘 곁을 지키며 대변인 역할을 해 주어야 했습니다.
젊은 시절 카사노바처럼 방탕하게 지내던 파가니니가 44세의 나이에 소프라노 가수인 안토니아 비앙키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이 아킬레였습니다. 파가니니는 비앙키와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아킬레를 맡아 키우면서 좀 더 잘 대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자주 말했다고 합니다. 아킬레를 엄청 아꼈던 파가니니는 아킬레를 연주 여행에 꼭 데리고 다니면서 집처럼 아늑한 분위기를 느끼도록 숙소를 호텔이 아닌 펜션에서 머무는 등 작은 부분도 세심하게 신경 썼습니다. 또한 파가니니는 자신의 팬인 귀족들에게 아들이 귀족이 될 수 있게만 해준다면 공연도 싸게 해주겠다고 고개 숙여 부탁하곤 했는데, 그의 노력으로 아킬레는 후에 남작 작위와 더불어 영지도 하사받는 귀족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아들을 키우기 시작하면서는 절제된 생활을 하면서 제법 재산도 많이 모은 파가니니는 사망 당시 어린 아들을 맡아줄 사람이나 재산 상속 등 모든 준비도 철저히 해 두었기 때문에 파가니니가 사망하고 나서도 아킬레는 큰 고생없이 잘 자랐고, 풍족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아킬레는 이렇게 자상한 파가니니를 아버지이자 연주자로 무척 존경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생전 원하던 대로 고향 성당 무덤에 묻어달라는 부탁을 평생 동안 지키려 노력했고, 자신이 못 이루면 후손들에게 대를 이어 이 유언을 지키라고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평생 헛소문에 시달리며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오명을 얻은 파가니니였는데 죽음조차도 그에게 안식을 가져다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생전의 악평 때문에 사후에는 더욱 매몰찬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사망 당일부터 시작된 그의 사후 수난은 무려 수십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만신창이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파가니니는 요양을 위해 들른 남프랑스의 니스에서 꼬박 7개월 동안 앓아누워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후두결핵에 걸려 목소리조차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840년 5월 27일, 침대에 누워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파가니니의 임종이 가까이 왔음을 느낀 사제는 악마가 나타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이 음악가의 고백과 참회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지나친 부담때문에서인지 방에 들어서자마자 다짜고짜 “도대체 당신의 바이올린에는 어떤 비밀이 있기에 그토록 놀라운 선율을 내는 것이오?”라고 파가니니에게 물었습니다. 한발 한발 찾아오는 죽음의 고통에 시달리던 음악가는 아무 대답도 하기 싫으니 제발 나가 달라는 뜻으로 그저 손짓만 했지만 사제는 물러서기는 커녕 한층 더 집요하게 질문을 퍼부었는데, 마침내 짜증이 솟구친 파가니니는 “그 속에는 악마가 숨어 있소.”라고 말하고 결국 숨을 거두었습니다. 14세 된 아들이 혼자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지중해 연안의 도시에서 1840년 5월 27일, 오후 5시 경 58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모두가 듣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증언을 파가니니에게서 억지로 끌어낸 카파렐리 사제는 니스의 주교를 찾아가 자신이 들은 사실을 전했고, 교회 측에서는 곧바로 이 비르투오소에게 조의를 표하기 위해 치던 조종을 중도에 모두 멈추도록 지시했다고 합니다.
아주 오랜 기간 유럽 전역을 떠돌며 연주 여행을 하다가 결국 타국인 프랑스에서 마지막을 정리하던 파가니니는 고향인 스위스 제노바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그의 후원자였던 디 체솔레 백작은 부패를 막기 위해 의사를 시켜 시신을 방부 처리해서 스위스로 옮기려고 했지만 교회 측의 반대로 파가니니의 시신은 제노바로 돌아가지 못하고 수년간 타향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의 시신을 둘러싸고 갖가지 소문이 무성해지자, 백작은 이 불운한 음악가의 유해를 자기 소유인 어느 작은 섬 동굴에 숨겨 놓았다가 사후 4년 뒤인 1844년에야 그의 시신은 니스를 떠나 제노바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교회 측의 반대로 인해 묘지에 묻히지 못하고 지하 납골당에만 임시로 안치될 수밖에 없었고, 파가니니의 시신이 영구 거처를 얻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 1876년의 일이었습니다.
아들 아킬레가 수없이 청원과 뇌물 공세를 펼친 끝에 파가니니의 시신은 마침내 지하 납골당에서 나와 교회 묘지에 정식으로 묻힐 수 있었는데, 부친의 임종을 지켜보던 14세의 소년이 이미 50세의 중년이 된 후의 일입니다. 사망한 지 무려 36년이 지난 뒤에야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는 비로소 대지의 품에서 안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파가니니의 묘비명은 “제노바 태생의 천재 음악가 니콜로 파가니니 여기에 영면하다”와 같이 간결했는데, 살아 생전의 모든 수식을 거둬낸 담백한 한 문장이었습니다.
'예술 > 클래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클래식-음악가14]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1) | 2024.02.01 |
---|---|
[클래식-음악가13] 말러 - 나에게 고향이 없네 (1) | 2024.01.31 |
[클래식-음악가11] 리스트 - 19세기 여성팬을 몰고 다닌 관종(?) 아이돌 (0) | 2024.01.28 |
[클래식-음악가10] 멘델스존2 - 세대를 뛰어넘는 브로맨스 (feat. 괴테) (3) | 2024.01.27 |
[클래식-음악가9] 쇼팽의 노스탤지어, 명곡 탄생의 비결 (1) | 2024.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