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스타프 말러 (Gustav Mahler, 1860-1911, 오스트리아)
1860년 7월 7일에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던 국경 지역 보헤미아의 작은 마을 칼리슈트(Kalischt)에서 독일어권 유태 상인이었던 부모의 둘째로 태어 태어난 말러는 어린시절 12명의 형제 중 5명은 디프테리아로, 누이는 뇌암으로 사망했으며, 동생은 자살을 하는 등의 파란만장한 가족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곧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모라비아의 이글라우(지금의 체코에 해당하는데, 몇 년 전 이 도시에 방문했을 때 아담한 도시 곳곳에는 말러를 기억하기 위한 마을 사람들의 노력이 돋보였습니다.)로 이주하여 어린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가 접한 음악은 농민의 음악과 군대음악이 전부였던 말러는 훗날 심리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에게 "어린 시절에 들었던 시골마을의 악대 또는 군악대의 소리를 회상하며, 그 음악들이 빚어내는 소박함과 통속성을 자신의 음악에서 결합하고자 하는 꿈을 가졌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가난한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소박하고 단순한 사건들은 그에게는 정신적 결핍과 같은 것이었고 이것이 음악으로 승화되었습니다.
피아노 교습을 통해 6세 때 처음으로 음악수업을 받게 된 말러는 일찍부터 음악의 재능을 나타내어 15세 인 1875년에 오스트리아 빈 음악원에 들어갔는데, 이 때는 같은 해에 태어난 휴고 볼프와 같은 반이 되었고 율리우스 엡슈타인(Julius Epstein)에게서 피아노를, 로베르트 푹스(Robert Fuchs)에게서 화성학을, 프란츠 크렌(Franz Krenn)에게서 작곡을 배우면서 음악가로서의 역량을 키워 나갔습니다.
1879년 바트 할(Bad Hall)의 여름 극장에서 처음 지휘자로서의 무대를 가진 데 이어 카셀, 프라하, 부다페스트. 함부르크에의 지휘자로서 계약 갱신 때마다 지위를 높이어 1897년에는 명예로운 빈의 빈 궁정 가극장의 음악감독이 되었고 10년간의 감독 생활을 하는 동안 특유의 완벽주의와 의지적 성품으로 비엔나 오페라에 큰 변화를 가져왔고 그의 명성 또한 절정에 다다르게 됩니다. 안정적인 생활 덕분에 1902년에 22살이었던 알마 쉰들러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지만, 1907년 성홍열로 둘째 딸을 잃고, 언론의 공격과 오페라단 내에서의 마찰 등으로 감독직을 사임을 하게 됩니다.
잠깐 그의 아내 쉰들러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그녀는 3명의 남자와 결혼했고 외도를 포함한 연인은 10명이 넘게 두었다고 합니다(여담으로 첫 키스의 상대는 '키스'를 그린 클림트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악처를 불리우는 이유는 단순히 줄줄이 이어지는 외도와 애인을 거느렸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치부를 덮기 위해서 많은 거짓말로 위대한 말러의 인생을 조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회고록에 말러를 성격파탄자에 성적으로 무능한 사람으로 묘사했고, 자신은 외로움과 싸우면서도 남편 말러를 헌신적으로 보필해서 그의 음악을 빛나게 하고 빚에 찌들어 있던 말러의 가정을 일으켜 세운 사람으로 묘사했다고 하는데요. 평생을 조작한 말러 스토리로 먹고 살았다고 하네요.
1907년에는 뉴욕으로부터 초대를 받아 도미하였으나 병을 얻어 빈으로 돌아와 1911년 5월 18일,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가 떠났을 때 그의 서랍 속에는 아직 발표되지 못한 세 편의 작품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2. 말러의 고독

1911년 5월 18일에 빈에서 51년이 채 못되는 생애를 마친 말러는 생전에 오케스트라 명지휘자로 알려졌으나 사후에서야 작곡가로서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이었던 말러는 오스트리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이방인으로서의 소외감을 느꼈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는 '첫째,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보헤미안 출신자로서, 둘째, 독일에서 오스트리아 인으로서, 셋째, 세계에서 유대인으로서’라는 이유를 들면서 ‘세 가지 점에 있어서 나는 고향이 없다’고 토로한 바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음악사는 그를 ‘이 세상에 흥겨운 노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슈베르트 다음으로 세상을 고통스럽게 바라본 작곡가로 기록하고 있다고 하네요. 아래의 리트에서 알 수 있듯이요.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는 행복과 불행을 병치하는 그만의 개성이 나타난 최초의 작품으로 불행한 연애를 좇아 상상한 내용의 가사는 말러 자신이 직접 썼습니다. 말러가 쓴 가사의 첫 줄은 “내 사랑하는 여인이 결혼을 할 때, 행복한 결혼을 할 때, 나는 비통에 잠긴 하루를 보낸다.” 라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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