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민 감독의 10년에 걸친 이순신 장군 시리즈 '명량', '한산:용의 출현', '노량:죽음의 바다' 그 서사의 대장정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 무슨 놈의 나라가 현존하는 본받을 만한 제대로 된 어른이 없어 아직도 400년 전 위인에 기대어 희망을 얻어야 하는지 자조섞인 마음으로 세 편의 영화를 관람하며 관객수에 연연하는 것은 단순 영화 마니아로서의 응원을 넘어선 이순신 장군 보유국으로서의 ""국뽕"" 에서 시작된 마음이리라.
그래서 우리의 역사를 관통하는 마음에 울림을 주는 인물들의 책을 읽으며 느꼈던 흔적을 반추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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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서애 유성룡의 <징비록>
고향인 하회 마을의 서쪽 절벽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자신의 호를 ‘서애’, 즉 ‘서쪽 언덕’이라고 지은 유성룡과 수려하고 기이한 땅 옆에 우뚝 자리하고 있던 ‘제비바위’라는 뜻의 ‘연암’을 호로 지은 박지원은 자연을 얼마나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는지 자신들이 불리고 싶었던 호를 통해 그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깊다고 생각합니다. 서애 유성룡 선생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비참하고 잔혹했던 7년 전쟁인 임진왜란을 선봉에 서서 진두지휘했기 때문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양란을 겪고 나서 ‘내 지난 잘못을 징계(懲)하여 뒷근심이 없도록 삼가(毖)노라’라는 <時經(시경)>에서 따온 ‘징비록’을 제목으로 써서 전쟁의 원인과 상황을 기록하여 후대에 경계로 삼고자 하는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글을 썼습니다.
조선왕조 500년을 돌아보면, 전성기는 세종 때인 15세기였고, 침체기는 선조 때인 16세기였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이 시기를 비교해 보니 세종 때는 약 60여 번의 외교사절단을 파견한 반면 선조 때는 6번 밖에 보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애 류성룡은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지피지기면 백전불패'인데, 우리나라가 '지피'도 '지기'도 하지 못했다고 징비록을 통해 한탄했습니다. 이 부분을 통해 선조라는 비겁한 왕을 섬기는 신하가 맡은 막중한 국가의 비상사태에서 겪었을 유성룡의 고뇌가 느껴졌고 그가 노골적으로 그런 마음을 드러내는 단호함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반면 연암 박지원 선생은 정조 4년 청나라 건륭 황제의 70세 생신 축하 사절에 편입되어 청나라로 여행하던 중 듣고 보고 느낀 점들을 수려한 필력으로 적어 내려간 여행기 열하일기를 저술했습니다. 열하일기가 그저 유희를 위해 쓴 목적 없는 저술이라는 데서 벼슬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던 박지원의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으며, 정조라는 성왕을 섬기며 덤으로 얻은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를 만끽한 박지원의 희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난세에 영웅이 나고, 태평성대에 문화가 꽃핀다’.고 했는데, 어려운 시대에 유성룡같은 영웅이 이순신같은 영웅을 발굴하고 태평성대에는 박지원같은 문장가가 나오게 되는구나라고요. 그런 연유에서 유성룡의 글에는 비장한 문체가, 박지원의 글에는 서정적이고 감상적인 문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약 200년이라는 시간차이가 있지만 이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약자의 나라 조선’이었습니다. 유성룡은 이미 겪은 전쟁을 다시는 겪지 않기 위해 과거의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글을 썼고, 박지원은 더 이상 뒤처진 문명의 나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청나라의 새로운 학문인 고증학이나 기술 문명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글을 썼던 것입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는데, 이제는 자타공인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섰다고는 하지만 21세기의 대한민국은 지정학적인 외교문제와 4차산업 혁명이라는 급변하는 현실에서 아직은 주변국과 새 문명에서 주도적인 입지를 다지지는 못한 ‘약자의 나라 조선’이 겪었던 입장과 비슷한 처지에 맞닥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미국과 중국이라는 고래와 같은 거대한 나라 사이에서 움츠리고 있는 새우같은 우리나라의 빈약한 경제 현실에서 '고래 싸움에서 새우가 등이 터지지 않으려면 새우의 몸집을 늘리면 된다'던 '재벌집 막내아들' 강훈이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우리나라 GDP가 세계10위인데 선진국지표는 32위에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BTS도 보유했고, 삼성전자도 있지만, 지정학적인 외교문제는 유성룡과 같은 혜안을, 문명혁명의 변화문제는 박지원과 같은 비상한 창의력을 갖춘 지도자가 떡하니 나타나 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경복궁 앞을 지키고 있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바통을 이어받아 본받고 싶은 인물이 21세기에는 등장해 주기를 바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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