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대한민국 클래식 역사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바로 그 사건.
피아니스트 조성진 군이 22세의 나이로 쇼핑콩쿠르에서 우승 소식이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전해지면서 클래식에 관심이 없던 대한민국 국민들이 열광했던 아름다운 기억 안에 쇼팽이 있습니다. 그 후 조성진 피아니스트는 아이돌들이나 가능하다는 클래식계에 티켓팅 전쟁이 벌어지게 한 장본인이 되었죠.
1.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 1810~1849, 폴란드)
평생 피아노곡 밖에는 쓰지 않아 다른 악기 연주자들의 원성을 사고 있는 쇼팽은, 피아노 분야에 있어서는 영원한 왕관을 쓰고 있다고도 할 수 있죠. 교향곡은 베토벤, 실내악곡은 하이든, 가곡은 슈베르트처럼, 피아노에서의 쇼팽은 유일한 왕좌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조성진의 연주 쇼팽의 <녹턴>을 듣다 보면 느끼겠지만 우리는 그의 음악 속을 거닐 때 은빛이 고고하게 만물을 비추는 가을의 달빛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달빛에 정화되어 고요히 빛나는 마음 속에서 꿈꾸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환상적인 경험을 하게 되죠.
1810년 3월 1일, 쇼팽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와 가까운 젤라조바 볼라에서 프랑스어 교사인 아버지와 폴란드의 천재적인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뭐야? 사기 아냐? 결국 유전이었어??). (유전에 힘입어) 6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쇼팽은 8세에 이미 신동으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어 12세 무렵부터 바르샤바 음악원의 원장에게 이론과 작곡을 배웠고, 아달베르트 지부니에게 피아노 교습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 쇼팽은 아무에게서도 정식 피아노 레슨을 받지 않고 작곡에 전념했으며, 1825년 14세의 나이로 최초의 작품 「론도」를 출판했으니 너무 비현실적인 천재인증인 셈이지요. 1828년, 아버지의 친구 야로츠키 박사와 함께 당시 음악의 중심지였던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엄청난 자극을 받고 귀국하여 왕성한 음악 활동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1830년 20세에 평소 동경해 왔던 빈으로 진출한 그는 조국으로부터 들려온 슬픈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이후 다시는 고향땅을 밟지 못했으니 조국 폴란드와 영원한 결별을 하게 됩니다. 러시아의 탄압에 대항하여 폴란드 혁명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에서 들끓어 오른 반폴란드 감정이 격해지자 쇼팽과 함께 빈에 동행했던 친구들은 조국의 위급한 상황에 동참하고자 앞다퉈 귀국했지만, 귀국하여 군대에 입대할 수 없었던 그는 피아노에 의지해서 애국의 열정을 작곡에 기울이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실의에 찬 쇼팽은 빈을 떠나 파리로 향하였고 조국의 패배 소식에 <혁명>이라는 곡을 작곡하게 됩니다.
평소 동경하던 파리는 무명의 천재를 당장 받아들여 주지는 않았지만 이미 혁명을 경험하여 자유롭고 낭만적이었던 프랑스 사교계는 폴란드에 호의를 보였고 섬세하고 고상한 쇼팽의 피아노 연주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쇼팽은 파리에서 만난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리스트가 천재성을 인정하여 파리 악단에 소개했기 때문에 피아노의 명연주가로 활약하면서 작곡 면에서도 자신의 입지를 굳혀 나가게 됩니다.
2. 카사노바였던가? 로맨티스트였던가?
엄청난 기교와 섬세한 표현력에 빛나는 쇼팽의 피아노 연주 실력은 이름난 칼이 명공의 손으로 다듬어지면 더욱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정교하고 치밀하면서도 풍부한 시적 감각이 솟아나는 예술의 삼매경, 그리고도 악상이 대담하고 독창적인 쇼팽은 음악 세계에서 완전히 독자적으로 군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파리의 낭만주의 운동의 중심이었던 귀족사회의 살롱에 출입하면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꽤나 잘 생겼잖아요~).
1836년 26세에 리스트에게 소개받은 여류 작가 조르주 상드(George Sand)와의 스캔들은 200년을 넘어 희대의 아름다운 로맨스로 전해지고 있죠. 상드는 연애 편력이 심했고 이미 남편과 아이가 있음에도 미남인 예술가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1837년 이후 심한 결핵을 앓고 있던 쇼팽은 상드의 지극한 간호를 받았고 두 사람은 이듬해부터 마요르카 섬에서 요양 생활을 하면서 사랑의 기쁨을 누렸는데, 쇼팽의 창작 의욕은 절정에 이르러 이곳에서 <24개의 전주곡집>과 2개의 <소나타>를 비롯하여 주옥같은 명곡을 썼습니다.
하지만 화려한 사교 생활을 좋아하는 상드와 내성적이고 고독에 집착하는 쇼팽은 언제까지나 이런 생활을 견딜 수 없었겠죠? 1846년 쇼팽 36세에 상드의 자녀 문제가 원인이 되어 9년 간의 밀애를 끝에 파리로 돌아간 두 사람은 마침내 헤어지는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3. 죽음까지도 슬픔
이별의 슬픔으로 깊은 상실감에 빠진 쇼팽은 1848년 파리에서의 마지막 연주회를 마친 쇼팽은 제자였던 스코틀랜드의 부자집 딸의 의뢰로 영국으로 연주 여행을 떠나 빅토리아여왕 어전 연주를 포함한 7개월 남짓의 여정을 마치고 파리에 돌아온 쇼팽(폴란드)의 병은 작곡 활동을 거의 중단할 정도로 극도로 악화되었고, 누나 루드비카가 간호하러 왔으나 이미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1849년 10월 17일, 향년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쇼팽의 시체는 해부했으며, 2주일 뒤에 마드레느 사원에서 모차르트의 레퀴임이 연주되는 속에서 장례를 치뤄졌습니다. 유해는 파리의 페르 라세즈 묘지에 묻혔고, 20년 전인 1830년에 폴란드를 떠날 때 친구들이 병에 담아 준 조국의 흙이 그 무덤 위에 뿌려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심장은 바르샤바의 성(聖) 십자가 교회에 보내졌다고 하네요.
페르 라세즈에 있는 그의 묘지에는 지금도 향과 꽃이 끊이지 않고, 그의 묘역에서 눈물을 흘리는 음악 애호가들로 붐비고 있다고 합니다. 처음에 말했듯이 쇼팽은 생애를 통해 거의 피아노곡 작곡에 전념했지만 예외적으로 6개의 관현악곡과 3개의 소나타, 3개의 실내악곡, 17개의 가곡도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또 즉흥곡 · 뱃노래 · 녹턴 · 마주르카 · 스케르초 · 왈츠 · 폴로네이즈 · 연습곡 · 전주곡 · 발라드 등은 쇼팽이 개척한 피아노곡 형식이었죠. 그 환상적인 시인 쇼팽은 고국 폴란드를 생각할 때 열렬한 애국심으로 건반을 피로 물들인 정열의 시인이라고 불리고 싶진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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