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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클래식 음악가2] 바흐를 환생시킨 카잘스를 아시나요?

by 언젠가 파리 2024.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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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블로 카잘스 (Pablo Casals, 1876.12.29. - 1973.10.22.) 생애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가까운 카탈루냐의 소도시 엘 벤드렐에서 태어난 카잘스는 첼로를 바이올린만큼이나 사랑 받는 현악기로 자리매김하게 한 20세기 전반의 최고의 첼리스트입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힌은 '카잘스의 단순함과 우아함, 고결함으로 인해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라고 고백했는데, 수도자와 같은 삶을 통해 깊은 예술의 경지에 다다른 진정한 예술가의 본보기가 되어 주었습니다.

 

  카잘스는 카탈루냐의 타라고나 지방에서 유명한 교회 오르가니스트이자 합창 지휘자의 아들로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피아노, 바이올린, 오르간을 배웠는데, "나의 음악적 재능은 전적으로 나의 아버지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고백했을 정도로 아버지를 자랑스러워 했다고 합니다. 8세에 이미 바이올린을 마스터하여 지방 연주회에서 연주할 정도로 음악적 재능을 보이던 그는 11세 때 첼로의 매력에 사로잡혔고 어머니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이윽고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학교에 입학해서 첼로 공부 공부에 몰두하게 됩니다.

 

  이후 전 세계 음악사에 길이 남을 사건이 일어나는데, 헌 책방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묻혀있던 첼로의 성서라 일컬어지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악보를 13세의 어린 나이였던 소년 카잘스가 우연히 발견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200년 동안이나 잠자고 있던 최고의 첼로곡이 그 오랜 침묵을 깨고 세상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1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일같이 이 곡을 연습하고 작품을 연구하여 25세가 되어서야 전곡 연주라는 획기적인 위업을 성취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입으로만 전해오던, 부둣가의 오래된 상점 한구석에서 먼지에 흠뻑 젖어 있던 악보 뭉치를 완벽하게 소화하여 숨겨져 있던 보물을 음악 청중에게 알리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는 멘델스존에 의해 부활한 《마태 수난곡》 연주에도 필적할 만한 《무반주 첼로 모음곡》 전곡 연주를 완벽하게 실현시키기 위해 새로운 주법을 개척하였습니다. 그는 1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작품을 선보이지 못한 것은 자신의 결여도니 자신감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완벽한 연주만을 추구했던 카잘스는 이 위대한 역작 앞에서 피나는 노력과 겸손함, 바흐에 대한 존경심을 오롯이 드러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로써 단순한 반주 악기에 불과했던 첼로를 화려한 독주 악기로 데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파리에서 데뷔한 것은 그것에 앞서는 1895년으로, 마드리드에서 학업을 마친 카잘스는 마침내 오페라 극장의 전속 연주자가 되면서 본격적인 연주 활동을 펼쳤는데, 3년 후 파리의 라므뢰 관현악단의 정기연주회에 독주자로 나서면서 탁월한 기량과 깊은 음악성으로 '첼로의 명인'이라는 칭송을 받게 됩니다. 젊을 때부터 실내악에도 의욕적이어서 1905년부터 피아니스트 알프레드 코르토, 바이올리니스트 자크 티보와 함께 트리오로 활동하며 최고의 실내악을 들려주었고, 조국 스페인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그는 1919년에는 사재를 털어 바르셀로나 카잘스 관현악단을 조직하여 음악의 대중화를 위해 자신의 봉급도 반납하고 적자는 연주비로 충당했다고 하니,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16년 동안이나 관현악단의 지휘 생활을 지속했던 그는 1939년 조국 스페인이 프랑코 독재 정권에게 지배 당하자, 그것에 강력하게 항의하여 프랑스의 시골 프라드에 틀어박혀 일체의 무대 활동을 중단하게 됩니다. 바흐 서거 200년인 1950년에 카잘스를 흠모하여 세계 각지에서 음악가들이 모여 프라드 음악제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각지의 음악제 등에는 자주 등장하게 되었지만 조국에는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았고, 1955년에는 푸에르토 리코에 옮겨 100년 가까운 긴 생애를 이 곳에서 보내다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20세기 초반의 첼로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연주자로 꼽히는 그는 9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매일 연습을 쉬지 않았던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2. 카잘스가 진짜 위대한 이유

  카잘스는 클래식이라는 음악이 화려한 공간 안에서만 공유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고, 진정한 예술가의 자리는 바로 대중 속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인간성을 수반하지 않은 예술은 허무하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카잘스는 자신의 음악이 인격적으로 성숙하기를 염원했고 그것은 음악은 만인이 함께 즐길 수 있었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에 의해 많은 사람들을 클래식 애호가로 끌어들이기에 충분했습니다.

  양심의 목소리에 따르는 것을 평생 동안 지켜 온 확고한 생활 신념을 지닌 카잘스의 강한 인간애를 겸비한 인격의 위대함이 그대로 음악의 위대함과 맺어져 있습니다. 바흐의 역작을 발굴해 낸 업적보다도 더 집중해야 할 것은 이 첼리스트의 모든 연주에서 듣는 이들이 마음 밑바닥부터 감동하는 진실의 울림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인데, 그런 의미에서 카잘스는 첼로연주사상의 정점에 서는 존재임과 동시에, 같은 고향 출신인 피카소와 함께 금세기 최고의 예술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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