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음악의 아버지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유는 오늘날의 음악이 그에 의해서 태어났기 때문이며, 바흐로부터 흘러나온 아름다운 선율의 샘에 의해 바흐 이후의 음악이 배양되었기 때문입니다. 모차르트의 아름다움, 베토벤의 강함, 슈베르트의 즐거움, 그리고 잇달아 나타난 많은 악성들이 만들어 낸 음악의 정화(精華), 그 모두가 바흐라는 예술의 최고명을 원천으로 해서 흐르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2. 바흐의 생애
바흐의 생가는 독일 튀링겐에서 200년 가까이 살아온 구가(舊家)이며, 대대로 순수한 튜튼족의 풍습을 존중하고 신앙이 두터운 일가였습니다. 음악적 혈통을 이어받아 사교 모임에서 가족들이 음악회를 여는 등 조상 대대로 음악에 대한 정진이야말로 후에 요한 세바스티안을 낳게 되는 토양이 되지 않았을까요?
1685년 3월 21일, 바흐는 튀링겐주 아이제나하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가풍에 따라 그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고 음악 수업의 기초를 쌓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0세 때 양친을 잃은 바흐는 형에게 의지하게 되고, 형의 지도로 클라비어(피아노의 전신)를 배우기 시작하는데, 바흐의 천재성이 이 무렵부터 급속히 싹트기 시작하여 난곡을 자유로이 연주해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그는 성악보다 기악 방면, 특히 오르간과 클라비어에 관심을 가졌고, 그 중에서도오르간에 대해서 각별한 흥미를 가졌다고 해요. 1707년 윌하우젠의 블라지우스 교회당 오르간 주자로 부임한 바흐는 그 고장에서 육촌 누이동생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와 결혼하게 됩니다.
교회의 모든 의식에 음악이 쓰였던 그리스도교에서는 음악이 교회당의 성쇠를 좌우했기 때문에 당시 교회의 오르간 주자라는 지위는 가장 중요한 자리 중 하나였는데, 오르간 주자는 음악장(音樂長)으로서, 성가대의 지도·훈련·지휘를 담당하고 또 예배 악곡을 작곡하는 일을 했는데, 바흐가 수많은 예배 악곡을 남긴 것은 그의 이러한 직책 때문이기도 했으며, 또 그의 두터운 신앙심에서 숭고한 예배곡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1708년 제1류의 오르가니스트로서 그 성망(聲望)은 절정에 달했던 바흐는 바이마르로 옮겨 대부분의 오르간 곡을 이 시기에 작곡해 냈습니다.
이후 1714년에는 궁정 관현악단 콘쩨르트 마이스터(수석 연주자)로 임명되어 활동 범위를 넓히고 각지를 연주여행하며 명성을 더욱 높여 갔고, 1717년 레오폴트 대공의 추천으로 궁정 예배당 관현악단의 악장으로 임명된 임기 중에 유명한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작곡합니다. 1723년에는 라이프찌히의 토마스 쉴레의 합창장 및 시(市)의 두 교회에서 악장으로 취임했는데, 그의 성망은 점점 더 높아져서 먼 곳에서부터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고, 바흐와 그 일가에 의한 모임은 당시의 모든 모임을 압도했다고도 하네요.
바흐는 엄청난 자식부자였는데, 최초의 아내에게서 7명의 자녀를 얻었는데, 1720년 바흐가 35세에 첫 번재 부인이 사망하고 1년 후 두 번째 결혼한 아내(안나 막달레나 바흐)에게서 13명의 자녀를 얻었습니다. 특히 궁정 트럼펫 주자의 막내딸로 쾨텐 궁정악단의 가수였던 두 번째 부인은 바흐의 창작 활동의 좋은 이해자였으며, 자녀들을 잘 가르쳐 많은 감화를 주었고 바흐는 그녀를 너무도 사랑하여 <안나 막달레나 바흐를 위한 소곡집>을 만들어 헌정했다고 하네요. 1747년 바흐는 베를린에 머물고 있는 아들 에마누엘을 찾아가 아들이 섬기는 프레데릭 대왕을 알현했는데, 프레데릭 대왕은 악성의 내방을 매우 기뻐하여 많은 작곡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습니다. 바흐는 1748년 최후의 역작이라고 할만한 「푸가 기법」에 착수했으나, 그 무렵부터 지병(持病)인 안질이 점차 악화되고, 당시 독일을 방문 중이던 영국의 명안과의(名眼科醫)에 의한 수술이 오히려 나쁜 결과를 초래하여 1750년 7월 28일, 이 위대한 음악의 거장은 결국 라이프찌히에서 65세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3. 바흐의 작품
바흐는 모든 악곡에 그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는데, 특히 오르간곡 · 오라토리오 · 실내악곡에 후대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연주 기법에서도 많은 진보를 이룩했는데, 피아노 주법에서도 당시의 몹시 유치했던 것을 현재의 주법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업적을 이루어 냈습니다. 특히 작곡에 있어서는 라모가 정한 12평균율 음계를 기초로 하는 화성법을 사용하여 더욱 뛰어난 형식의 음악을 만들어 근세적 복음악(複音樂)의 최고 형식을 완성했음은 그의 가장 위대한 공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무엇보다도 바흐가 작곡한 기악곡의 위대함은 그를 음악의 아버지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부분입니다. 바흐 시대의 악기는 오늘날의 악기와는 달랐는데, 바이올린의 형태는 오늘날과 달랐고 첼로는 4개의 줄이 아니라 5개의 줄을 갖고 있었음을 그의 작품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바흐가 가장 힘을 기울여 많이 작곡했다고 여겨지는 작품은 오르간곡인데, 오늘날 남아 있는 오르간곡은 예상보다 훨씬 적습니다. 이것은 충분히 퇴고(堆敲)한 결과가 아니면 악보로 남기지 않는 바흐의 성격때문이기도 하고 많은 오르간보(譜)가 거듭되는 화재 때문에 불타 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하니 참 슬픈 일이네요.
바흐의 기악곡은 실내악을 확대한 정도의 규모로 작곡된 것이 대부분인데 「모음곡」이건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이건, 그 악기의 구성을 생각하면 오늘날의 관현악곡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소규모의 것이었습니다. 바흐가 남긴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은 그가 음악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까닭을 가장 잘 나타내는 걸작이고, 또 그가 유럽식 음계 조직을 개량하려 했던 큰 이상을 나타내는 것이며, 바흐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는 걸작 중의 걸작이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전까지는 실내악의 저음역대를 담당하는 정도에 머물렀던 악기인 첼로는 바흐 시대에 겨우 모습을 나타내어 독립성을 보여준 새로운 악기인데, 그 음색의 뛰어난 심원성에 착안한 바흐는 6개의 모음곡을 작곡하게 됩니다. 당시의 첼로는 오늘날의 첼로와는 상당히 달라 이 6개의 모음곡 중의 제6번 모음곡은 5현의 첼로를 위해 작곡된 것이지만, 오늘날에는 5현의 첼로가 없으므로 4현 첼로용으로 편곡되어 연주되는데, 이 악보의 발굴에 대한 유명한 일화 또한 관심을 가져 볼만한 사건입니다. 이 일화에 얽힌 인물 소개는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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