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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클래식

[음악가] 비운의 첼리스트-자클린 뒤 프레2 : 사랑이 죄는 아니잖아

by 언젠가 파리 2024.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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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클린 뒤 프레가 우리 곁을 떠난 지 40여 년이 되어 가지만, 우리의 그리움만큼이나 영원히 고통받고 있는 그의 전남편 다니엘 바렌보임이 있습니다. 

1. 운명적 사랑?

   음악이 인생의 전부였던, 엄마의 치마폭에 싸여 세상사에는 어두웠던 그녀에게도 사랑이 찾아옵니다. 미국에서 데뷔 무대를 갖은 자클린은 1966년 12월 31일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아르헨티나 출신의 러시아계 유대인인 다니엘 바렌보임 (Daniel Barenboim)과 운명적인 첫만남을 하게 되었고, 이내 불타는 사랑에 빠져 가족들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기독교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자클린은 결혼을 강행하여 만난지 6개월 만인 1967년 6월 15일, 이스라엘 웨스턴 홀에서 유대교식으로 세기의 결혼식을 올립니다. 이 결혼식은 여러모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는데, 일단 제3차 중동전쟁이 한창이던 때, 전쟁 중에 치른 결혼식이라는 점도 그랬지만, 22세의 매력적인 첼리스트와 26세의 천재 피아니스트의 결혼은 가장 아름다운 음악가의 결합이라는 찬사와 함께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여기에 결혼식 때 기라성 같은 음악인인 주빈메타와 핑커스 주커만이 들러리를 선 것도 주목을 끌었는데, 유대교에 의하면 유대인만이 들러리를 설 수 있었지만 인도 출신의 주빈메타가 유대인 행세를 함으로써 이 의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후일담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둘의 사랑은 슈만과 클라라의 사랑과 비교될 정도로 음악계를 넘어 전세계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고, 이후 축복받은(?) 두 명의 젊은 천재 음악가들은 뜨거운 사랑만큼이나 열정적으로 음악 활동을 해 나갔는데, 바로크 음악부터 고전을 거쳐 낭만, 현대 음악에 이르는 실내악과 협주곡 레파토리를 이미 섭렵하고 있던 자클린은 바렌보임에게 힘을 실어 주며 세계적인 거장들과 함께 음반 활동과 연주회를 이어 나갔는데, 특히 1970년 바렌보임이 이끄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의 엘가 [첼로 협주곡] 실황 레코딩은 그 이전의 어떤 연주보다도 더 성숙해진 신들린 명연주로 자클린과 바렌보임의 음악적 교감이 최고도로 무르익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2. 자클린의 재능을 질투한 운명

   세계적인 거장인 스승들도 혀를 내두르게 한 빼어난 연주력에 아름다운 외모, 게다가 사랑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순정한 여인, 우아하면서도 유쾌하던 자클린, 하늘이 허락한 그녀의 행복은 거기까지였던 걸까요? 음악적 역량이 폭발적으로 분출되던 결혼3년차, 행복한 결혼생활과 모두에게 추앙받는 커리어로 부러울 것 없던 그녀에게 불행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합니다. 1970년 무렵부터 눈에 띄게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하다 조금씩 아픈 증세를 호소하며 연주에 집중하지 못하던 자클린은 '꿈속에서도 쇳덩이를 끌고 다니는 기분'이었다고 합니다. 리허설에서 피로감에 쓰러지거나, 손가락이 저리고 차가워 활을 놓치는 일이 많아졌으며, 눈이 침침해지고, 걸음걸이도 자꾸만 볼품 없어져 갔던 자클린. 그러나 자클린의 이런 증세가 잦아져 남편에게 자신의 증상을 털어놓았지만 슈퍼맨 같은 정력을 지닌 완벽주의자였던 바렌보임은 '정신적으로 해이해졌기 때문' 이라고 정신력 문제를 거론하며 그녀를 더욱 혹독하게 몰아 붙였습니다. 바렌보임으로서는 그녀의 연주력이 쇠락해 간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고, 주위 사람들도 그녀가 피곤해하는 이유는 신경성때문이라고 생각했고, 병원에서조차 이유도 모르는 채 1년 정도 휴식을 권했고, 신문은 그녀가 노이로제 증상에 시달린다,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다, 심지어는 그녀의 음주벽 때문이라는 둥 떠들어 댔습니다. 1971년 6월부터 12월에 걸친 6개월 동안 자클린은 첼로에 전혀 손댈 수 없었고, 자신이 아픈 것이 정신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서 일주일에 5회나 프로이트 학파의 정신분석과 월터 조피에게 치료를 받으러 다녔죠. 그해 12월의 어느 아침, 기분이 좋아진 자클린은 남편과 쇼팽의 첼로소나타를 녹음했는데, 이틀째에 베토벤의 첼로소나타를 녹음하면서 그녀는 다시 극도의 피곤한 기색을 보였고,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레코딩이 되었습니다. 겨우 그녀의 나이 스물여섯이었죠.

 

   이듬해인 1972년 7월 16개월 만에 다시 무대에 선 자클린의 연주회는 성공적이었지만 그녀는 불안했습니다. 언제 팔이 떨릴지 몰라 무대 공포증이 점점 엄습해 왔죠. 1973년 1월 25일, 뉴욕필하모닉 홀에서 그녀가 브람스, 쇼팽, 드뷔시의 소나타를 연주했을 때, 그녀에 대한 언론의 평가는 정반대로 바뀌어,  좋은 의미로 “그녀는 나를 미치게 한다”라며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비평가들조차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하고 그녀의 일관성 없고 조리없는 연주는 “정말 우리를 미치게 한다”는 악평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뉴욕에서 번스타인의 지휘로 핀커스 주커만과 브람스의 2중 협주곡을 연주하게 되었을 때, 리허설에 참석한 자클린은 첼로 케이스를 여는 데도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야 할 정도로 상태가 나빠졌는데, 그냥 신경성이라고 판단한 번스타인은 자클린에게 그냥 무대에 서게 했고 결국 이 연주에게 그녀는 청중의 실망을 뼈아플 정도로 느낀 비참한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 심각함을 느낀 번스타인이 그녀를 의사에게 데려갔지만, 진단 결과는 여전히 스트레스였습니다.

   이후 그녀의 두려움은 극심한 상황에 이르렀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사람으로 삶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그 둘을 잘 알고 있던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의 부인인 라이자 윌슨의 그 당시에 대한 회상“그녀 혼자서 외출하는 일이 잦았어요. 쇼핑을 하거나 들판을 거닐거나 했죠. 그러다가 넘어지면 지나가는 사람이 도와줄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답니다. 그러나 늦은 귀가에 남편이 화를 내면 ‘쇼핑하다 보니 입고 싶은 옷이 많았어요’라고 거짓말로 둘러대곤 했어요…”은 우리를 참 슬프게 만듭니다. 

 

   결국엔 아마 도로변이었다고 생각되는데,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병원으로 실려가는 지경이 되어서야 신경성 문제가 아니라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질병임이 밝혀졌는데, 진단을 받은 그녀는 오히려 '난 괜찮아, 난 미친 게 아니래.'라고 친구들에게 알리며 자신의 정신에는 문제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후 자클린은 다시는 첼로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   1982년 이후로 자클린 곁에는 정신과 의사와 간호사뿐이었습니다. 남편 바렌보임을 비롯한 주위의 사람들은 바쁘거나,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차츰 연락 횟수가 줄었고, 그녀의 가족들조차 바렌보임과의 결혼을 위해 무리하게 개종해서 병에 걸린 것이라며 그녀를 외면했습니다.

3. 새드엔딩 : 배신? vs 슬픈 끝맺음?

  결국 극심한 고통으로 투병생활을 이어나가야 하는 그녀 곁에 머물러 주었어야 할 단 한사람, 바렌보임. 하지만 그는 너무 젊었고 열정적이었으며 커리어의 중심에 서 있었죠. "1년에 500일이이라도 일을 하고 싶은데 왜 1년은 365년 밖에 없냐"며 투덜댈 정도로 왕성한 활동으로 분주했던 그는 다른 여자의 품으로 자클린을 떠나 버렸습니다.

  바렌보임은 자클린이 이혼을 해주지 않자 무작정 자클린을 떠나 새로 사랑에 빠진 피아니스트 엘레나 바쉬키로바(Elena Bashkirova과)와 동거를 하며 아이까지 낳게 됩니다. 아직 여자였고 누구보다도 더 정열적인 사랑을 했던 자클린이 느꼈을 육체적 고통 위에 얹어진 절망과 고독, 비애와 비통, 상실감과 배신감, 적막감과 처참함...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그 어디쯤의 감정이 정신적 고통으로 이어졌겠죠? 그럼에도 그녀는 생전에 "난 운이 좋아 그를 만났고, 연주하고 싶었던 곡을 모두 녹음했다"라고 회상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끝까지 남편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바렌보임’과 협연한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자주 들으며 위안을 느꼈다고 합니다.

   척수 손상으로 안면 마비로 눈물조차 흘릴 수 없던 고통스러운 투병을 이어나가던 자클린은 사람의 체온이 그리워 자신을 돌보던 물리치료사에게 한 번만 안아 달라고 했다고도 합니다. 아무도 없는 밤에는 홀로 외로움에 떨며 절망적으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서 와달라고 조르곤 했고, 하루 종일 울리지 않는 수화기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남편의 연락을 기다리던 자클린은 자신의 음반을 듣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견디다 남편과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채 1987년, 우리에게서 아주 먼 곳으로 떠나게 됩니다. 

   자클린은 죽기 전까지 바렌보임에게 이혼 도장을 찍어주지 않았고, 바렌보임은 42세의 나이로 세상의 떠난 그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며, 결국 자클린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피아니스트 엘레나 재혼할 수 있었습니다. 자클린의 무덤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은 바렌보임이지만, 그녀의 묘비명은 "다니엘 바렌보임의 사랑하는 아내"라고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자클린이 영원히 기억되고 싶었던 이름은, 세계의 천재 첼리스트도, 전세계가 사랑한 음악가도 아닌 소박하게 한 남자의 사랑을 받는 여인, 그 하나였던 걸까요? 그녀의 슬픔의 깊이가 어느 정도였을지 납득이 되는 묘비명이 더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4. 자클린을 잊지 말아요. 영국 (화남주의) <불필요한 첨부>

   다니엘 바렘보임(Daniel Barenboim)은 1975년부터 1989년까지 프랑스 파리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 1991년부터 2006년까지 미국 시카고 심포니의 음악 감독을 거쳐 현재 독일 베를린 슈타츠카펠레(Staatskapelle Berlin)의 종신 지휘자로 있으면서 전 세계 유명 교향악단의 객원 지휘자로 승승장구하며 지금까지도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2012년 런던올림픽 개막식에서 이 다니엘 바렌보임은 올림픽기 운반 행렬에 참여합니다. '그를 영국인들이 받아들인 것'이죠. '영국의 붉은 장미'라며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던 첼리스트 자클린을 홀로 떠나 보낸 그를. 용서가 이렇게 쉬운 거였던가요? 다니엘 바렌보임은 독일 음악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던 영국에 엘가라는 자국 작곡가의 곡을 40년 만에 심폐소생시켜 전세계가 사랑하는 곡으로 만들어 낸 보물 자클린을 빼앗아 가 영국인들을 공황 상태에 빠트린 인물입니다. 하필 아르헨티나 출신의 유대인이었던 바렌보임을 사랑해서 순수 영국 혈통 연주자 자클린이 유대교로 개종하면서까지 결혼을 한 것이 얼마나 못마땅했겠어요? 게다가 이들 부부가 결혼할 무렵에는 자클린의 인기와 명성이 바렌보임보다 더 높았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바렌보임의 불륜이었는데, 영국인들은 자클린이 무서운 병으로 세상에서 밀려나자 바렌보임이 그녀를 헌신짝처럼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바렌보임은 불륜녀와 재혼하고 자클린의 무덤조차 찾지 않았던 바렌보임에게 '조강지처를 버린 인정머리없는 이기주의자',  ‘자클린을 이용하기만 한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이 늘 꼬리표처럼 따라다녔습니다. 어찌 됐든 두 사람이 지극히 사랑했을 때 부부이자, 음악적 동료로서 함께했던 엘가의 첼로협주곡 녹음은 전설로 남았고, 자클린이 세상을 떠난 지 25년이 흐른 2012년 8월. 영국인들은 그들의 가장 큰 잔치에서 ‘밉기만 했던 철없던 사위’ 바렌보임을 받아들인 영국.  

(이건 온전히 "자기적 편견 시점"입니다. 곧 편견없는 바렌보임의 이야기도 올려 볼게요)

5. 자클린의 눈물 

   첼리스트들의 워너비 연주곡인 오펜바흐의 <자클린의 눈물>.

  이전에도 한 번 소개해 드린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였던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 1819~1880)가 작곡하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발표하지 않은 100여년 동안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잊혀져 가던 곡, <자클린의 눈물>은 그 원제가 자클린의 눈물이 아닐뿐더러 작곡가인 오펜바흐가 직접 붙인 제목도 아니었습니다. (자클린은 오펜바흐 사후 65년 후에 세상에 태어났으니 그 두 사람은 만난 적조차 없으니, 당연한 얘기겠죠?)

​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 작품과 관련된 또 한사람, 독일 첼로연주자 토마스 베르너( Thomas Warner Mifune 1941~)

그는 어떻게 이곡을 찾아내어 세상에 발표하게 되었을까요? 어쨌든, 오펜바흐의 유작 중 미발표된 곡을 발견하고 정리하던 자클린과 동시대를 살았던 베르너 토마스는 100년 넘게 세상에 발표되지 않은 오펜바흐의 곡을 찾아 내고 요절한 비운의 천재 첼리스트 자클린을 떠올립니다. 그리고는 '자클린의 눈물'이라는 부제를 붙이고 직접 연주하여 자클린에게 헌정하게 됩니다. 

   <자클린의 눈물>이라는 처연하고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분출되지 못하고 꿈틀거리는 애절한 감정을 절묘하게 표현한 선율에서 우아하고 순수하고 쓸쓸했던 그녀의 영화 같은 삶을 느꼈기 때문일까요?

  24분부터 첼리스트 강예은의 오펜바흐의 "자클린의 눈물" 연주 감상해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2A3EoBhh2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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