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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클래식

[클래식-음악가19] 베를리오즈 - 관현악의 이단아

by 언젠가 파리 2024.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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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이 엑토르 베를리오즈 (Louis Hector Berlioz, 1803-1869, 프랑스)

  1803년 12월 11일 프랑스 리옹 교외의 라 코트 생탕드레에서 태어난 베를리오즈는 어릴 때부터 예민하고 열정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고, 천성적으로 음악과 문학에 강하게 끌렸지만 주변에 제대로 된 음악교육기관이 없는 시골 마을에서 자란데다 피아노도 없었기에 피아노를 배울 기회도 없었습니다. 피아노 대신 플루트와 기타 연주를 배우고 12세 때 플루트와 클라리넷을 연주하고, 작곡공부도 독학으로 시작했습니다. (요즘 한국에서의 열광적인 의대 쏠림 현상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의사였던 베를리오즈의 아버지는 장남인 베를리오즈를 자신처럼 의사가 되어 가업을 이어나가기를 바랐고, 17세가 된 베를리오즈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파리로 의학을 공부하러 가지만, 의학에 흥미를 보이지도 않았고 음악 또한 그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지 않았습니다. 타고난 음악적 감수성과 예술가적 기질을 억누를 수 없었던 그는 파리에서 의학공부보다는 오페라에 매료되었고 23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를 겨우 설득하여 의학공부를 포기하고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시작하게 됩니다. 

  베를리오즈는 음악원 재학 시절, 그가 평생 흠모하게 될 두 영웅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셰익스피어와 베토벤입니다. 베를리오즈가 친구 에드워드 로셰에게 1829년 1월 11일에 보내는 편지에는 “위대한 베토벤의 음악을 들었을 때 나는 음악이라는 예술이 궁극적으로 도달해야할 목표를 깨달았지. 하지만 그의 음악보다 더 새롭고 훌륭한 음악이 가능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네. 그는 이미 음악이라는 예술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봉에 다다랐거든. 하지만 베토벤과는 다른 방향도 있을 거야. 세상에는 새로운 것들, 새롭게 해야 할 것들이 많으니까…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나는 반드시 해내고 말겠어.”라고 쓰여있는데, 베토벤을 향한 존경심과 더불어 그를 능가하는 새로운 음악을 창조하려는 베를리오즈의 야망이 드러납니다. 여태까지 그 누구도 감히 시도해보지 못한 음악,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참신한 음악. 그것이 바로 베를리오즈가 꿈꾸던 음악의 혁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그의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작곡 스타일은 당시 파리 음악원장이었던 작곡가 루이지 케루비니를 비롯한 당시 보수적인 교수들과 음악적으로 자주 마찰을 빚었습니다. 

  또한 그의 음악 인생은 그다지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의학을 포기하고 뒤늦게 음악가의 길을 선택한 초기의 생활은 궁핍함 그 자체였습니다또한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천재적인 음악가들과는 달리 그가 다룰 줄 아는 악기도 거의 없었고 심지어 피아노조차도 칠 줄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작곡가들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쏟아 부어야만 한 곡을 겨우 완성할 수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그의 초보적인 도전은 오히려 전통적 시각과 틀을 깨는 데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런 그의 부족한 음악 실력은 결코 모방할 수 없는 자신만의 음악을 창조하는 원천이었고신선한 음색과 음향으로 새로운 음악 세계를 열어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음악원에서는 매년 1위 입상자에게 로마대상을 수여하고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 갈 수 있는 기회를 지원했는데, 4번의 도전 끝에 가곡 「클레오파트라」를 작곡하여 1830년에 드디어 유례가 없는 25명의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작곡부분에서 로마대상을 받으면서 이탈리아로 유학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졸업하고 난 뒤 그에게 행운이 바로 찾아 온 것은 아닙니다. 그의 고정관념을 깨는 상상을 초월하는 독특한 음향을 만들어내는 혁신적인 관현악곡들은 당시 보수적이었던 그의 고국 프랑스의 청중들을 이해시키지 못했고 평생 경제적인 궁핍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당시 유럽에서 명성을 떨치며 군림하고 있던 바이올린의 귀재 파가니니가 베를리오즈의 천재를 인정해 작곡을 의뢰하고 1834년 베를리오즈가 작곡한 「이탈리아의 해럴드」의 독주부분을 파가니니가 맡아 초연하면서 비로소 자신감을 회복하게 됩니다. 파가니니는 이 곡의 작곡료로 2만 프랑을 지불했는데, 이 큰 돈이 베를리오즈에게 큰 용기를 준 것이지요. 베를리오즈는 보수적이며 완고한 당시의 프랑스 악단으로부터 이단아 취급을 받았지만, 그는 그런 보수적인 음악사조에 휩쓸리지 않으려 했고, 그에게 찾아온 행운은 프랑스에서가 아니라 독일에서였습니다. 1842년 벨기에와 독일로 최초의 음악 여행을 한 그는 가는 곳마다 예상 외의 열광적 환영을 받게 되고 쇄도하는 초대 연주로인해 그의 여행일정은 상상 초월의 강행군이 되었습니다. 
  이듬해 1843년에는 라이프찌히에서 슈만을 만나고 베를린에서 마이어베어를 만난 것 또한 그의 음악 커리어에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만하임을 기점으로 하여 독일 전 지역에서 성공한 그의 연주 여행은 러시아와 영국에도 전해져, 1847년에는 러시아에 가서 엄청한 성공을 거두고, 1851년에는 런던에까지 건너가게 됩니다. 이로써 파리를 제외한 전 유럽은 베를리오즈의 진가를 발견하고 그에게 열광하게 됩니다. 이에 베를리오즈는 여러 지역의 악단을 지휘하면서 동시에 수많은 명곡을 만들었지만, 정작 본인의 고국인 프랑스에서는 음악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당시 음악계에 적이 많았고, 악단의 주목을 받고 능력을 인정받기도 하지만 아깝게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프랑스 음악계로부터의 환영받지 못했고, 1869년 3월 8일에 타계한 이후에야 프랑스 음악계로부터 인정받게 됩니다. 

 

2.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는 교향곡

  베를리오즈의 걸작 「환상 교향곡」은 1830년에 작곡되었는데, 여배우 스미드슨과의 사랑이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됩니다. 

  관현악의 이단아로 불리며 "표제 음악"(Program music)이라는 새로운 극적인 관현악곡 스타일을 창시 오늘날 ‘근대 관현악의 아버지’로 평가받으며 거장의 반열에 올라섰지만, 처음부터 새로운 음악이 항상 긍정적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좋은 평가보다 기존 음악에 도전했다는 반발이 더 거셌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음향을 실제 오케스트라 소리로 표현하기 위해 파격적인 오케스트레이션(여러 악기의 특성에 따라 작곡이나 편곡하는 기법)에 도전하는데, 악기의 표현력에 관심을 기울여 전통적 음악에 부합하지 않는 독창적인 기법들은 매번 음악 애호가들에게 혼란을 야기했고 호된 비판을 받았습니다. 베를리오즈의 작품을 연주하기 위해선 어마어마한 수의 연주자들을 동원해야 하기 때문에 선뜻 무대에 올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전통적으로 팀파니나 큰북 등은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되는 악기지만 전통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던 베를리오즈는 팀파니에도 음높이가 있으니 4명의 티파니 소리로 천둥소리를 실감나게 표현한다든지, 수십 대의 팀파니를 한꺼번에 연주하면 화음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습니다. 또 같은 제1바이올린 섹션이라도 그것을 몇 개의 성부로 더 세분화할 수 있는 것처럼 가장 낮은 음을 내는 더블베이스 섹션도 얼마든지 여러 성부로 분할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보이스트가 무대 뒤에서 연주하여 멀리 있는 목동의 피리 소리를 표현한다든지, 베를리오즈의 작품 중에는 대규모 합창과 트롬본 6대와 하프가 12대가 필요한 것도 있으며, 대 편성 오케스트라 외에도 별도의 금관 오케스트라 4개를 사방에 배치해야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대규모 합창과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필요도 하는 베를리오즈의 작품들은 그 어느 음악작품들보다 ‘비싼’ 작품들입니다. 그래서 공연이 성공한다 해도 이익을 남기기는 커녕 적자를 피할 수 없지요. 그래서 오늘날에도 베를리오즈의 대규모 작품들을 연주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일단 무대에 오른 베를리오즈의 음악은 그 독특한 음향과 끓어오르는 열정, 압도적인 클라이맥스로 청중을 사로잡습니다.

  거듭된 논란 때문에 베를리오즈의 작품 활동은 음지와 양지를 오락가락했지만 그는 표제음악을 포기하지 않았고 꿋꿋이 자신만의 음악을 완성해 나갔습니다. 그는 문학적 상상력을 소리로 구현하기 위한 실험과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는데, 이런 새로운 음악적 시도가 잘 드러난 곡이 바로 ‘환상 교향곡’입니다.

  ‘환상 교향곡’은 베를리오즈가 27살이 되던 1830년에 작곡한 곡으로, 이곡으로 인해 그는 음악가로서의 명성을 알리기 시작합니다. 셰익스피어의 열렬한 팬이었던 베를리오즈는 파리에 방문한 영국의 셰익스피어 극단의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과 <햄릿>을 보게 되는데, 여주인공 <햄릿>의 오필리아역을 연기한 해리엣 스미드슨에게 첫눈에 반합니다. 하지만 인기절정의 여배우는 무명의 청년음악가를 거들떠 볼 리가 없었기 때문에 단박에 베를리오즈의 고백을 거절합니다. 짝사랑의 열병을 앓으며 상심한 베를리오즈는 길거리를 방황하다가 한 카페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다섯 시간 만에 의식을 회복하게 되는데 이런 자신의 처지에 괴로워하던 베를리오즈는 자신이 겪은 짝사랑의 아픔과 고뇌를 잠들었을 때 꾸었던 꿈을 바탕으로 음악을 만들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완성된 음악이 바로 ‘환상 교향곡’입니다. 이 곡은 실연으로 인해 절망에 빠진 젊은 예술가가 마약의 일종인 아편으로 자살을 시도하지만, 혼수상태에 빠진 채 기괴한 환상에 사로잡힌다는 내용의 표제 음악입니다. 한편, 이 환상 속에서 예술가의 연인은 언제나 특정 선율의 형태로 등장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HgqPpjIH5c

Philharmonique de Radio France, 정명훈 지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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